#1 : 도입부
넓은 전당에 놓인 왕좌에 주인공인 가웨인이 앉았다. 주술사같은 목소리가 이제부터 가웨인의 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도중에 왕좌에 앉은 가웨인의 머리가 불타오른다. 마치 '그러나 네가 알던 그 이야기는 아니다'라는 메세지를 던지는 느낌이다. '가웨인 경과 그린 나이트(Sir Gawain and the Green Knight)'는 영어권에서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 영화의 시작부는 '하지만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너가 알던 얘기와는 조금 다를 것이다'라고 말하는 느낌을 준다.
#2 : 첫번째 크리스마스와 그린나이트의 등장
크리스마스날 가웨인은 본인 집도 아닌 매음굴 같은 곳에서 자는 중이다. 그 때 그의 정부인 에셀이 장난스럽게 물을 끼얹어 그를 깨우며 '크리스마스'날이 밝았다고 말한다. 깨어난 가웨인은 전날 방탕하게 논 결과로 본인 신발도 제대로 찾지 못한다. 영웅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매우 멀다. 에셀은 가웨인에게 '아직 기사(knight)가 되지 않았냐'고 장난스레 묻는다. 가웨인은 '아직 아니다.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가웨인은 집으로 들어간다. 가웨인의 어머니는 가웨인에게 뭐하다 이제 돌아왔냐며 책망을 한다. 아서 왕이 주최하는 크리스마스 연회에 갈 준비를 하는 가웨인은 자신의 어머니는 외출 차림새가 아님을 알아채고 '왜 옷을 갈아입지 않으시냐'고 묻는다. 그러자 가웨인의 어머니는 '올해는 연회에 갈 기분이 아니'라며 '네가 대신 가서 보고 들은 것을 말해달라'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다. 미리 말해두자면 가웨인의 어머니는 주술사(witch)다. 아서왕은 가웨인의 어머니를 여자형제(sister)라고 부른다. 다만 친남매인지 이복관계에 있는지는 확실하게 밝히지 않는다. 원작 서사시에서는 가웨인의 어머니는 아서왕의 이복 여형제(step sister)다. 어쨌든간에 가웨인도 왕족인 셈이다.
가웨인은 홀로 연회에 참석한다. 그런데 아서왕이 갑자기 가웨인을 불러서 옆자리에 앉힌다. 이에 가웨인은 '어찌 감히'라며 조심스러워하지만 왕은 재차 옆자리에 앉을 것을 권유하며 '어차피 주인도 없는 자리이다'고 말한다. 왕위 후계자가 없음을 관객에게 암시하는 대목이다. 유일한 혈족이라고는 이렇다할 업적도 없이 놀러만 다니는 가웨인 뿐이다. 왕은 그런 가웨인에게 그동안 왕래가 없었음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말과 함께 '크리스마스 선물로 나에게 너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말한다. 연회장에는 원탁의 전설들이 모두 모였다. 그 자리에서 이야기를 한다면 상당한 위업에 대한 이야기여야 한다. 가웨인은 '들려드릴 이야기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왕 옆에 앉은 왕비가 '아직은 없겠지'라고 말한다. 아서왕이 갑작스레 가웨인을 부른 것도 그렇고 왕비의 말도 그렇고 왕과 왕비는 무언가를 아는 듯한 표정이다.
그 순간 연회에 참석하지 않은 주술사인 가웨인의 어머니는 다른 젊은 주술사들과 빈 방에 모여 마법을 부린다. 왕이 연회장에서 연설을 마칠 즈음에 가웨인의 어머니는 편지를 한 편 쓰고는 그 편지를 태워버린다(이 때 가웨인의 어머니는 옷감 같은 것을 말아 눈을 가린다. '눈을 가렸다'는 점을 잘 기억하자). 이 편지를 태워버리는 장면은 가웨인의 어머니가 그린 나이트에게 편지를 전달해주는 장면이라고도 해석이 가능하다.
편지가 타오름과 동시에 큰 소리와 함께 연회장 문이 열리면서 그린 나이트가 등장한다. 그린 나이트는 가웨인의 어머니가 태웠던 그 편지를 꺼내 왕에게 건넨다. 대략적인 편지내용은 다음과 같다.
"누구든지 용기를 내어 칼로 나를 내려치는 사람에게는 거대한 도끼를 줄 것이며 그에게 부와 명예가 찾아갈 것이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1년 후에 나를 다시 찾아와서 나에게 같은 공격을 받아야 한다." (이 부분도 그 의미를 잘 짚어봐야 한다. <그린 나이트>의 중심 단어는 '교환'이다. 이 주제는 영화 내내 유지된다. 자막 번역은 그때그때 적당한 단어를 쓰지만 'in exchange´라는 대사가 계속하여 나온다.)
그린 나이트는 이를 '크리스마스 게임(christmas game)이라 부른다(이 '게임'이라는 단어도 영화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단어다).
이 때 가웨인이 나선다. 가웨인이 나설 때에도 아서왕은 가웨인에게만 들릴만한 작은 목소리로 '기억해라. 이건 그저 게임에 불과하다(it is just a game)'라고 말한다. 역시나 무언가를 이미 아는 듯한 뉘앙스다. 호기롭게 나선 가웨인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린나이트의 목을 내리쳐 그린 나이트의 머리를 땅에 떨어뜨린다. 하지만 그린 나이트는 죽지 않는다. 목이 잘린 채로 일어서더니 머리를 집어든다. 그리고는 가웨인에게 1년 후에 자신을 찾아와야함을 다시 주지시키고는 아주 만족스러운 듯 크게 웃으며 말을 타고 사라진다. 여기서도 머리가 잘린 그린 나이트가 만족스러운 듯 크게 웃은 이유는 무언가가 계획대로 돌아가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이 사건으로 가웨인에게도 이야기가 생겼다. 가웨인은 유명해졌으며 가웨인이 그린 나이트의 목을 친 이야기를 주제로 한 인형극도 인기다. 하지만 가웨인의 삶은 별다른 변화가 없다. 여전히 진탕 술만 마시며 놀러다닐 뿐이다.
#3 : 빠르게 지나간 1년과 여정의 시작
1년은 빠르게 지나간다. 또다시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무렵이었다. 가웨인은 늘처럼 술집에서 진탕 술을 마신다. 싸움질까지 한다. 몰골이 엉망이 되어 밤 늦게 집으로 돌아오니 아서왕이 친히 가웨인의 집에 와서 가웨인을 기다리는 중이다. 아서왕 옆에는 가웨인의 어머니도 있다. 분위기상 그 둘은 가웨인이 오기 전까지 무슨 대화를 나누었던 듯하다. 왕이 1년 전 약속을 상기시키자 가웨인은 '폐하, 그것은 그저 게임이 아니었습니까'라고 말한다. 이 역시도 영웅호걸과는 거리가 먼 태도다. 이에 왕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게임'이라고 말한다. 가웨인이 여정을 떠나기를 두려워하자 왕은 '내가 너에게 위업을 기대하는 것이 잘못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가웨인은 '위업을 이룰 운명이 아닐까봐 두렵습니다'고 한다. 겁쟁이같은 모습이다.
가웨인은 결국 반강제로 여정을 떠나게 된다. 여정을 떠나기 전에 에셀은 가웨인에게 결혼해달라는 뜻을 내비추지만 가웨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에셀는 가웨인에게 '방울'을 징표로 준다. 가웨인의 어머니는 마법이 깃든 허리끈을 가웨인에게 준다. 그러면서 '이 허리끈을 허리에 매고 있으면 어떤 공격으로부터도 안전하다'고 말한다. 이 허리끈도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소재이다. 잘 기억해두자. 그렇게 가웨인은 그린 나이트가 준 거대한 도끼, 정부가 징표로 준 방울, 어머니가 준 허리끈을 들고 여정을 떠나게 된다.
# 4 : 강도
가웨인은 여정 중 버려진 전쟁터에서 시신을 뒤지는 한 소년을 만난다. 소년은 기사처럼 보이는 가웨인에게 전쟁터에 가보았냐고 묻는다. 전투 경험이 없는 가웨인은 거짓으로 경험이 있는 척 대충 둘러댄다. 소년은 가웨인에게 그린 나이트가 있는 곳의 방향을 가르쳐준다. 그 이야기를 들은 가웨인은 '고맙다'는 말만 남기고 그 자리를 뜨려 한다. 그러자 소년은 낯빛을 바꾸며 자신이 친절을 베풀었는데 고작 '고맙다'는 말이 다냐면서 따진다. 거듭된 소년의 요구에 가웨인은 은화 한 개를 소년에게 던져주고 가던 길을 간다. 은화를 받은 소년은 그것으로는 만족을 하지 못하는 표정이다. 이것이 가웨인이 여정 중에 겪은 첫 번째 '교환'이다. 그리고 가웨인은 제대로 된 값을 치르지 않았다. 이 불만스러운 소년은 알고보니 날강도였다. 날강도는 여성 일행 둘과 함께 가웨인을 공격한다. 가웨인은 기사처럼 꾸민 복장과는 어울리지 않게 힘도 한 번 못 쓰고 자신보다 덩치도 훨씬 작은 이들에게 제압당해 살려달라고 빈다. 무력하기가 그지없다. 어린아이들 셋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자신은 기사가 아니라고도 말한다(사실이긴하다). 이 때 날강도는 가웨인에게서 허리띠와 도끼를 뺏어간다. 도끼를 집어 든 날강도 소년은 갑자기 마법에 걸린 듯 가웨인의 말을 타고 자신이 임무를 완수하겠다며 퇴장한다.
가웨인은 손발이 묶인 채 버려진다. 이 때 쓰러진 가웨인은 자신이 묶인 채로 죽어 백골이 되어버리는 장면을 떠올리고는 정신을 차린다. 멀지 않은 곳에 날강도들이 던져두고 간 칼이 보인다. 가웨인은 죽을 힘을 다해 칼 쪽으로 기어가 밧줄을 푸르고 맨몸으로 다시 길을 떠난다.
#5 : 위니프레드
지쳐 쓰러질 무렵 가웨인의 시야에 오두막집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들어서니 아무도 없다. 2층으로 올라가니 푹신한 침대가 보인다. 지칠대로 지친 가웨인은 침대에서 잠이 든다.
얼마 후 '내 침대에서 뭐 하는 중이에요?'라는 소리를 들은 가웨인은 화들짝 놀란다. 어떤 젊은 여성이 가웨인에게 '내 침대에서 뭐 하는 중이냐'며 재차 따지며 묻자 가웨인은 미안하다면서 바로 떠나겠다고 한다. 여인은 자신을 위니프레드라고 소개하면서 자신을 아냐고 묻는다. 가웨인은 모른다고 말하는데, 이 장면도 가웨인의 무지함을 빗대어 표현한 장면이 아닌가 싶다. 위니프레드는 가웨인에게 어딜 가냐고 한다. 가웨인은 '집으로'가던 중 길을 잃었다고 말한다. 날강도에게 당한 뒤 여정을 계속 할 의지를 잃고 다시 고향인 카멜롯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그러자 위니프레드는 가웨인에게 부탁을 한 가지 한다. '머리'를 잃어버렸으니 머리를 찾아달라고 말이다. 가웨인이 당신 머리는 당신 목 위에 잘 붙어있지 않냐고 하자 위니프레드는 그렇게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이에 가웨인은 위니프레드가 인간인지 유령인지 확인하려고 위니프레드 쪽으로 손을 움직인다. 그러자 위니프레드는 '손 대지 말라'며 '기사답게 행동하라'고 가웨인을 질책한다. 가웨인이 그럼 머리를 어디서 잃어버렸냐고 묻자 위니프레드는 연못에 빠졌다고 말한다. 연못에 들어가기 전에 가웨인은 '머리를 찾아주면 무엇으로 보답할거냐'고 묻는다. 이에 위니프레드는 재차 '왜 그런걸 묻냐'며 기사답지 못한 가웨인을 다시 책망한다.
가웨인은 연못으로 뛰어들고 그 안에서 해골을 찾아 연못 밖으로 나온다. 위니프레드는 온데간데 없고 귀여운 여우 한 마리가 가웨인은 바라본다(이 여우는 가웨인 어머니의 주술이 걸린 동물, 즉 가웨인 어머니의 분신인 셈이다). 위니프레드의 집으로 다시 들어가니 침대 위에 목이 잘린 뼈만 남은 시체가 보인다. 그 때 해골이 위니프레드의 얼굴로 변하고 가웨인은 깜짝 놀라 머리를 떨어뜨린다. 머리뿐인 위니프레드는 가웨인에게 '그린 나이트는 네가 아는 누군가이다'라고 힌트를 준다(머리를 찾아준 것에 대한 보답(교환)인 셈이다). 뒤를 돌아보니 빼앗겼던 도끼가 보인다. 도끼를 되찾은 가웨인은 임무를 다시 떠올리고 다시 길을 떠난다.
#6 : 험지를 걸으며 겪는 고난
가웨인은 다시 험한 길을 걷는다. 걷던 중 비를 피해 동굴로 피신한 가웨인은 불을 피우려 하지만 불 하나도 제대로 피우지 못한다. 그 때 동굴 입구에 위니프레드의 연못에서 봤던 여우가 보인다. 가웨인은 돌맹이를 던져 여우를 쫓아내려 하지만 여우는 도망가지 않고 계속 가웨인을 쳐다본다. 이에 가웨인이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와'라고 말하자 여우는 말을 알아들은 듯 동굴로 들어와 가웨인 옆에서 잠을 잔다. 그때부터 이 여우는 가웨인과 항상 같이 다닌다(이 여우는 가웨인 어머니의 주술적 분신이라고 봐야 한다).
가웨인은 다시 길을 나서고 온갖 고생을 한다. 제대로 먹지 못해 힘이 빠져 발을 헛딛여 나뒹군다. 그 과정에서 에셀이 준 방울을 잃어버리지만 그는 그런줄도 모르고 가던 길을 간다. 배가 고파서 급한대로 뜯어먹은 버섯이 독버섯이라 구토를 하고 징그러운 환영을 보기도 한다. 지칠대로 지친 가웨인의 눈 앞에 초자연적인 대상이 보인다. 산보다 더 큰 거인들이 어디론가 걸어간다. 가웨인은 어리석게도 겁없이 그들을 불러 세워서는 어깨에 태워줄 수 없냐고 묻는다. 가웨인을 바라보던 거인은 큰 손으로 가웨인을 움켜쥐려 한다. 이 때 여우가 앞에 나서서 거인을 막는다. 거인도 여우를 보고는 여우가 마법적인 존재인걸 알았는지 다시 손을 거둔다. 개인적인 해석으로는 그 거인은 정말로 가웨인을 어깨에 태워주려는 생각이었으나, 정해진 임무를 수행해야 왕위 후계자로서의 스토리가 완성되기에 여우가 이를 막은 것이 아닌가 싶다. 여우가 거인에게 계획에 훼방을 놓지 말라고 말한 셈이다.
#7 : 성주와의 만남
위니프레드의 집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가웨인은 또다시 힘을 잃고 쓰러진다. 그러자 여우가 가웨인에게 앞을 보라는 몸짓을 한다. 가웨인이 고개를 들자 커다란 성이 눈에 들어온다. 가웨인은 온 힘을 짜내어 성으로 가서 성문을 힘차게 두드린다. 성문이 열리고 성주는 가웨인에게 '친구여!'라고 외친다. 지칠대로 지친 가웨인은 그대로 쓰러진다.
가웨인은 잠에서 깬다. 바로 곁에 성주가 보이자 가웨인은 화들짝 놀란다. 성주는 가웨인의 이름을 부르며 겁먹지 말라고 안심시킨다. 가웨인이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아냐고 묻자 성주는 '너와 그린 나이트와의 일화는 널리 퍼져 모르는 이가 없다'며 가웨인을 치켜세운다(참고로 원작 이야기에서는 이 성주가 바로 그린 나이트이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성주가 그렇다면 그런 상황이다.
성주는 가웨인을 식사 자리로 데려온다. 그곳에는 성주의 아름다운 아내와 눈을 가린 노인이 앉아서 가웨인과 성주를 기다린다(여기서 '눈을 가린'노인에 주목하자. 그리고 영화 초반부에 가웨인의 어머니가 그린 나이트를 소환하는 주술을 부릴 때 눈을 가린 모습을 떠올려보자. 성에 있는 노인도 가웨인의 어머니와 똑같은 형태로 눈을 가렸다. 즉, 이 노인도 가웨인 어머니의 분신인 셈이다. 가웨인은 영웅적인 여정을 떠난다고 떠났지만 온갖 방식으로 어머니의 보살핌을 계속하여 받는다). 가웨인은 카멜롯에 두고 온 에셀과 똑같이 생긴 성주의 아내를 보고 놀란다. 가웨인이 자신은 그린 나이트를 만나러 떠나야하기에 식사만 마치고 바로 떠나겠다고 하자 성주는 껄껄 웃으며 그린 나이트가 있는 녹색 예배당은 성으로부터 하루도 안 걸리는 거리라고 말하면서 성에서 며칠 쉬면서 크리스마스 당일에 맞춰 길을 떠나면 된다고 일러준다.
성을 구경하던 가웨인은 책으로 가득 찬 방을 만난다. 가웨인이 이런저런 책들을 구경하는데 성주의 아내가 들어온다. 알고보니 그곳은 성주의 아내의 서재였다. 가웨인이 성주의 아내에게 이 많은 책을 다 읽었냐고 묻자 성주의 아내는 다 읽었다고 답하며 가웨인에게 책을 좋아하냐고 묻는다. 이에 가웨인은 '그렇다'고 답한다(가웨인이 책을 읽는다는 암시는 영화 어디에도 없다). 성주의 아내는 가웨인에게 책을 한 권 선물하면서 매혹적인 눈빛을 보내며 답례로 키스를 해달라고 한다. 그러자 가웨인은 입술이 아닌 볼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화답한다. 첫 번째 유혹은 그런대로 잘 넘긴 셈이다.
여기에도 재미있는 장면이 보인다. 앞서 말했듯 가웨인은 길을 가던 중 에셀이 준 방울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에셀과 똑같이 생긴 성주의 아내가 오더니 그 방울을 내밀면서 이것이 무엇이냐 묻는다. 가웨인은 그 방울을 잃어버렸는지도 몰랐기에 그냥 '징표'라고만 말한다. 그러자 성주의 아내는 '사랑의 징표'냐고 묻고 가웨인은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에셀과 똑같이 생긴 사람 앞에서 에셀을 배반한 셈이다.
그날 저녁 가웨인과 성주와 성주의 아내와 눈을 가린 노인은 거실에 모인다. 그곳에서 성주는 가웨인에게 한 가지 게임을 제안한다. 자신이 사냥에서 무엇을 잡든 제일 좋은 것을 가웨인에게 줄테니 대신 가웨인이 그 성에서 얻게 되는 물건은 자신에게 달라고 말한다. 가웨인이 '여기가 당신 성인데 제가 당신께 드릴 물건이 있겠습니까'라고 묻자 성주는 '세상에는 온갖 신비한 일들이 벌어지는 법'이라며 알수없는 대답을 한다. 그 때 성주의 아내가 불쑥 그린 나이트가 왜 그린(초록색)인지에 대해 말을 한다. 이 장면에서 성주의 아내는 가웨인을 가르치는듯한 말투로 그린(초록)이 갖는 의미와 그린이 상징하는 자연이 얼마나 무한한지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욕망도 자연 앞에서는 그저 흔적에 불과하다는 내용의 말을 이어간다. 가웨인은 이를 잘 이해하는 표정은 아니다.
다음날에도 성주는 사냥을 떠난다. 그러자 성주의 아내가 가웨인의 방으로 들어선다. 그러면서 어제는 왜 자신의 방에 오지 않았냐고 물으며 가웨인을 유혹한다. 그러면서 매혹적인 몸짓을 하며 가웨인에게 줄 선물이 있다고 말하면서 허리띠를 꺼낸다. 가웨인이 빼앗겼던 그 허리띠와 똑같은 허리띠였다. 놀란 가웨인이 그 허리띠를 어디에서 구했냐고 묻자 성주의 아내는 자신이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가웨인의 어머니가 한 말과 똑같은 말을 한다. 그 허리띠를 허리에 매는 한 어떤 공격도 가웨인에게 피해를 주지 못한다고. 성주의 아내는 가웨인을 유혹하면서 허리띠를 갖고 싶냐고 묻는다. 육체적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에셀과 똑같이 생긴 성주의 아내의 몸짓에 가웨인은 홀린듯이 '원한다'고 말하면서 수음을 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더니 사정을 하고 만다. 이에 성주의 아내는 '당신은 기사가 아니에요'라고 핀잔을 주고는 사라진다. 당황한 가웨인이 주변을 둘러보는데 알고 보니 그 눈을 가린 노인이 모든 장면을 다 지켜보고 있었다. 놀란 가웨인은 옷을 챙겨입고는 허리띠와 도끼를 들고 성 밖으로 도망친다.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짚고 넘어가자. 가웨인이 날강도에게 빼앗긴 물건 중 상징적인 물건이 도끼와 허리끈이었다. 가웨인의 여정은 이 두 가지를 되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근데 그 되찾는 과정이 좀 뜬금없다. 그린 나이트의 도끼도 위니플레인의 집에 갑작스럽게 나타나고 허리끈도 성주의 아내가 갑작스럽게 건넨다. '신비한 일'이다. 이 모두가 가웨인의 어머니가 마법적으로 설계한 일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맞아 보인다.
도망치는 가웨인을 성주가 멀리서 불러세운다. 성주의 아내와 부끄러운 행동을 했기에 가웨인은 성주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저 떠나겠다고만 말한다. 그러나 성주는 가웨인에게 다가와 떠나는건 괜찮은데 자신에게 줄 게 없냐며 '게임의 규칙'을 상기시킨다. 규칙대로라면 가웨인은 성주에게 허리끈을 돌려주어야 맞다. 그의 성에서 얻은 물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웨인은 허리끈을 돌려주지 않는다. 그 허리끈이 자신의 목숨을 지켜줄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린 나이트와 다시 만나도 그 허리끈이 있다면 그린 나이트의 공격으로부터 무사할 것이라는 희망 때문에 가웨인은 성주에게 아무것도 돌려줄 것이 없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러자 성주는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분명히 무언가가 있는데. 분명 무언가가 있어. 내가 빼앗을 수 있을 것 같은데'라고 말하고는 가웨인에게 입을 맞추고 허리끈은 뺏지 않는다. 이 입맞춤은 가웨인이 방금 전 성주의 아내와 한 행동을 상기시키는 입맞춤이다.
가웨인이 다시 떠나려고 하자 성주는 '사냥으로 잡은 동물이 있는데 원래 선물로 주려했으나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그냥 놓아줘야겠다'며 동물이 든 포대자루를 푸른다. 그러자 포대에서는 그 여우가 나온다.
#8 : 그린 나이트와의 재회 직전
이제 가웨인은 그린 나이트가 있는 곳에 거의 다 왔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갑자기 여우가 앞길을 막더니 가웨인에게 말을 한다. 사람 말을 하는 여우를 본 가웨인은 화들짝 놀란다. 그런 가웨인에게 여우는 '왜 사서 고생을 하려고 하냐. 여기서 되돌아가도 비밀로 해줄테니 목숨을 부지해라'면서 가웨인을 자극한다. 하지만 가웨인에게는 그 허리끈이 있었다. 가웨인은 도끼를 휘둘러 여우를 쫓아버린다. 여우는 정말로 가웨인을 말릴 생각은 아니었다. 마지막 테스트라고 보는 편이 맞다. 이 모습은 온갖 고난과 모욕과 수모를 겪은 가웨인이 이제 어느 정도 용기를 지니게 되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여우를 쫓아버린 가웨인은 보란듯 준비되어있는 쪽배를 천천히 저어가며 그린 나이트가 있는 곳을 찾는다. 얼마 가지 않아 녹슨 십자가 표시가 나오고 온통 이끼와 식물(green)로 뒤덮힌 예배당이 나온다. 그리고 그 안에 겨울잠이 든 듯 미동도 없는 그린 나이트가 보인다. 가웨인이 예정보다 성에서 빨리 도망을 쳤기 때문에 때는 아직 크리스마스 전날이라서 그린 나이트가 깨어나지 않은 모습이다. 가웨인은 그 앞에서 그린 나이트를 바라보며 하루를 보낸다.
#9 : 그린 나이트와의 재회
1차 시도
크리스마스 날이 밝자 그린 나이트가 깨어난다. 가웨인을 발견한 그린 나이트는 게임을 마무리 짓자고 말한다. 가웨인은 겁에 잔뜩 질린 채로 겨우 그린 나이트의 일격을 받을 준비를 한다. 하지만 그린 나이트가 도끼를 휘두르려는 순간 가웨인은 움찔하며 피하는 시늉을 한다. 이에 그린 나이트가 왜 그러냐며 책망한다. 가웨인은 다시 겁에 잔뜩 질리지만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공격을 받을 준비를 한다.
2차 시도
그린 나이트가 두 번째로 도끼를 휘두르려고 하자 가웨인은 '잠깐! 잠깐!'을 외치며 그린 나이트에게 '정말 이렇게 끝내는거냐(나를 죽이는거냐)?'고 묻는다. 여기서 한 가지 떠올려야 하는 사실은 가웨인이 그 허리띠를 허리에 맨 상태라는 점이다. 게다가 위니플레인은 그린 나이트는 가웨인이 아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그러니 가웨인은 마음 속으로 그린 나이트가 정말로 자신의 목을 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하면서 그린 나이트를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기세를 보니 그린 나이트는 정말로 가웨인의 목을 칠 기세다. 가웨인은 그래서 그린 나이트에게 '정말 이렇게 끝이냐?'고 물은 것이다. 그린 나이트는 당연하다는 듯 '그럼 이거 말고 뭐가 더 있겠어?'라고 답한다. 이에 가웨인은 체념한 듯 다시 무릎을 꿇는다.
가웨인의 상상
가웨인은 그린 나이트의 공격으로부터 도망쳐서 카멜롯으로 돌아간다면 앞으로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를 상상한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기에 떳떳하지 못하게 되고, 어머니와 아서왕을 볼 면목은 없다. 하지만 유일한 혈육이기에 아서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기는 한다. 떳떳하지 못한 왕이다. 에셀와 관계를 맺어 아기를 낳지만 에셀은 신분이 천하기에 왕비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아기만 빼앗고 결혼은 신분이 맞는 다른 사람과 한다. 그 후로도 불행은 계속된다. 전장에서 아들을 잃고, 전투에서는 거듭 패하여 랜슬롯도 적의 손에 넘어가기 직전이다. 이 모든 과정에서 가웨인은 그 허리띠를 절대로 풀지 않는다. 심지어는 에셀과 성교를 할 때에도, 신부와 첫날밤을 보낼 때에도 허리띠는 맨 채다. 이 허리띠는 가웨인의 겁많음과 비겁함의 상징이다. 적들이 왕궁 바로 앞까지 밀어닥치자 왕비도 둘 사이에 낳은 딸을 데리고 어디론가 가고 어머니도 어디론가 떠난다. 홀로 남은 가웨인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표정으로 그제서야 허리띠를 푼다. 허리띠를 풀자 가웨인의 목에 금이 가고 머리가 잘려 땅에 떨어진다. 즉, 도망친 삶은 이미 죽은 삶이나 다름없었다.
3차 시도
이와같은 상상을 한 가웨인은 그 순간이 되어서야 무언가를 깨닫는다. 비겁하게 도망가서 살아남아봐야 죽음만도 못한 삶을 살게 됨을 깨달은 가웨인은 그린 나이트에게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하고는 허리띠를 풀어서 던져버린다. 그러고는 담담히 꿇어 앉아 그린 나이트의 일격을 기다린다. 허리띠를 풀어 던진 가웨인을 본 그린 나이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가웨인에게 '잘했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도끼 대신 손가락으로 가웨인의 목을 자르는 시늉만 하고는 '이것으로 게임은 끝났다'고 말한다.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 10 : 쿠키 영상
엔딩 크레딧이 끝날 즈음에 재미있는 짦은 영상이 하나 나온다. 어린 여자아이가 엉금엉금 기어오다니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왕관을 집어다 머리에 쓴다. 이에 대한 해석은 여럿이겠지만 개인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다. 가웨인이 양심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와 왕이 되어 왕국을 잘 다스렸다 해도 왕국이란 결국 끝나게 되어있다. 왕관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닌다면 이는 그 왕국은 그저 옛날 이야기가 된지 오래 되었다는 뜻이다. 왕관 조차도 어린 아이의 장난감이 되어버린 것이다. 즉 인간 세상의 유한성을 표현한 장면이 아닌가 싶다. 그린 나이트는 가웨인의 여행 이야기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긴 하지만 크게 보면 인간의 욕망(가웨인)과 자연(그린 나이트) 사이의 게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성주의 아내가 그린(green)의 의미를 말하면서 인간의 일시성과 자연의 무한성을 강조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영화와 원작 이야기와의 관계
이 영화는 원작을 모르는 상태에서 봐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개인적으로도 처음 봤을 때에는 원작 내용을 모른 채였다. 영화가 너무 훌륭하여 원작 내용도 찾아보았는데, 그 뒤에 영화를 다시 보니 즐길 거리가 배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원작과는 전혀 다른 면이 많기 때문이다(원작과 똑같은 영화는 굳이 만들 필요가 없기도 하다).
우선 원작 제목은 <Sir Garwain And The Green Knight>이다. 번역하면 <기사 가웨인 경과 녹색 기사>다. 원작에서 가웨인은 이미 기사인 셈이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다르다. 영화에서 가웨인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기사가 아니다. 영화에서 가웨인은 아직 기사가 아니기 때문에 기사가 되기 위해서 여정을 떠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아서왕 세계관에서 가웨인은 절세 영웅이다. 엄청난 무용을 자랑하는 원탁의 기사 중에서도 핵심 인물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가웨인은 그저 힘없는 혈통만 왕족인 못난 남자이다. 가웨인이 날강도에게 당하는 장면은 원작에는 없다. 영화는 그 장면을 끼워넣음으로써 가웨인이 얼마나 무용이 없는 인물인지를 그려냈다.
이런 점들만 봐도 <그린 나이트>가 원작을 얼마나 크게 재해석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린 나이트>에 대한 개인적 해석
왕위 계승 자리가 빈 상태에서 혈족이라고는 한심한 가웨인밖에 없다. 이상태로는 아무리 혈족이라도 왕위를 물려줄 수가 없다. 한심한 놈을 쓸만한 인간으로 만들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그래서 가웨인의 어머니와 아서왕은 게임을 하나 기획한다. 그래서 그린 나이트를 불러 가웨인이 대자연 속에서 온갖 고생을 하고 온갖 수모를 당하고 온갖 수치심을 느끼며 성장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가웨인을 대자연 속으로 무턱대고 밀어넣기에는 또 걱정이 된다. 그래서 가웨인의 어머니는 가웨인을 위해 온갖 장치를 마련한다. 마법력을 가진 허리띠도 만들어서 주고 여우로 화하여 아들 가웨인과 동행하며 보호도 하고 안내도 한다. 성에서 가웨인이 유혹에 빠질 때에도 눈을 가린 노인으로 화하여 계속하여 지켜본다. 집 떠나 보낸 자식이지만 가웨인의 어머니는 가웨인 모르게 계속하여 가웨인을 보살핀다. 가웨인이 깨달음을 얻게 만든 마지막 상상에도 개인적으로는 가웨인 어머니의 주술적 힘이 한 몫 단단히 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럼 그린 나이트는 누구일까. 원작에서는 성주가 바로 그린 나이트이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래보이지는 않는다. 가장 그럴듯한 해석은 영화 속 그린 나이트는 자연을 대변하는 초월적인 존재이다. 다만 그웨인의 어머니와 마법적 교류가 가능한 관계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자연을 대표하는 그린 나이트 입장에서도 아서왕의 왕위를 이어받을 인간이 자연의 위대함을 깨닫는다면 나쁠 것이 없다.
<그린 나이트>는 영화를 작품으로서 감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축제같은 영화이다. 화면과 음향도 훌륭하고 영화가 흘러가는 내내 관찰하고 해석해낼 장치들이 즐비하다. 앞으로 길게 남을 영화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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