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은 한국 영화계에는 마르지 않는 우물과도 같다.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없을 만큼 방대한 양을 자랑하다 보니 아무리 파 내어다 써도 밑이 드러나지 않는다. 오백여년 동안 사관들이 불철주야 왕 옆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들을 기록한 실록이라 그 오백여년 동안 일어난 온갖 일들이 기록되어있다. 양이 너무도 방대해서 그 누구도 조선왕조실록의 전문가라고 말을 할 수가 없다. 한 개인이 평생을 읽어도 제대로 다 읽지 못할 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접근성은 좋다. 검색창에 '조선왕조실록'이라고 치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엄청나게 잘 정리해 둔 자료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 원본도 모두 스캔하여 올려두었고, 원본과 번역본을 붙여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조선왕조실록은 영화나 드라마계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마르지 않는 이야기 주머니이다.
'올빼미'는 그 중 한 구절로부터 출발한 영화이다. 인조 때에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세자가 8년만에 돌아왔는데 돌아오자마다 급사했다. 온 몸 모든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독살당했을 경우와 증세가 같다. 안태진 감독은 이 대목에서 '과연 어떻게 독살을 했을까'를 궁금해했다. 그리고는 이야기를 써 나갔고 그 결과 만들어진 영화가 '올빼미'이다.
'올빼미'는 그 목격자로 맹인 침술사를 내세웠다. 하지만 완전한 맹인이 아니다. 밝을 때에는 완전히 맹인이지만 어두울 때에는 어느 정도는 시력이 돌아오는 주맹증 환자인 천경수(류준열)를 목격자로 내세웠다. 사람들은 그를 맹인으로만 알지 주맹증 환자인줄은 모른다. 그래서 천경수는 엄청난 현장을 목격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 자신의 운명과 양심 사이에서 방황하면서 살얼음판 같은 결정을 해 나가게 된다.
'올빼미'는 역사적 흐름이 아닌 아주 개별적인 사건만을 발췌하여 만든 영화이다. 사극이라기보다는 그 시대에 쓰인 자료를 가지고 만든, 배경이 그 때인 스릴러다. 스릴러는 당연하게도 스릴이 넘쳐야 한다. 그리고 빈틈이 없어야 하거나 관객이 빈틈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스릴러라는 장르 자체가 어느 정도는 현실과 거리감이 느껴지는 장르기에 웬만한 비현실성은 관객들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넘긴다. 하지만 개연성에 눈에 띄게 문제가 생긴다면 쌓아가던 스릴도 한 순간에 무너지고 관객은 계속 물음표를 던지게 된다. 관객마다 바라는 개연성의 수준이 다르긴 하겠지만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되도록 누가 봐도 개연성이 느껴지는 영화를 만들어야 하지 않나 싶다.
이런 면에서 개인적으로는 '올빼미'에서 아쉬움을 많이 느꼈다. 천경수가 완전한 맹인이 아닌 주맹증 환자라는 사실이 왕실 침술사로 발탁된 이후에까지도 확인이 되지 않는다는 설정도 좀 무리라고 느꼈다. 물론 이 정도는 관객에 따라서는 충분히 납득하고 넘어가기도 하겠지만 약간의 장치만 더 마련하면 개연성을 지켰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또한 아무리 어두운 밤에는 약간의 시력이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밤만 되면 궁궐 안을 거의 파쿠르하듯 자유자재로 질주하는 천경수의 모습은 몰입을 깨뜨리는 요소였다. 또한 아무리 맹인이라 여긴다 해도 세자를 암살하는 자리에 천경수를 아무렇지도 않게 데려가는 어의의 모습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 중 하나였다. 침술을 받는 세자가 너무도 무방비 상태인 것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 모두가 간략한 영화적 장치 한두개 정도면 개연성이 살아나는 부분들인데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다. '나 살자고 이러는 것입니다'라고 하는 천경수가 영화 막판에 갑자기 그렇게 소중하게 지키려고 했던 친동생의 안위마저 위험에 빠뜨리는 무모한 행동을 하고 나서는 장면도 당황스러웠다. 의로운 주인공이 해피엔딩을 맞는 영화를 만드려고 억지로 끼워맞춘 느낌이었다.
그래도 영화는 지루하지는 않았다. 유해진이 보여준 연기 때문이었다. 우리에게 코믹한 연기로 잘 알려진 배우 유해진은 '올빼미'에서는 병자호란 때 겪은 수모로 인한 극심한 PTSD와 그로 인한 왕좌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보이는 인조-인조가 정말 그랬는지 여부는 차치하고-를 몰입감 넘치게 연기해냈다. 보여준 연기의 범위만 놓고 보자면 개인적으로 본 유해진의 연기 중에서 단연 최고였다. 영화 '올빼미'에서 가장 스릴러적이었던 것은 사건 흐름이나 주인공의 상황이 아닌 유해진의 연기였다. 어쩌면 그의 연기 덕분에 많은 사람들에게 이 영화가 가진 개연성상의 아쉬움이 가려졌을지도 모른다. 유해진의 연기가 아니었다면 앞서 언급한 이 영화가 가진 어색한 면들이 더 크게 드러나지 않았을까 싶다.
'올빼미'와 같은 영화들은 말하자면 빈 칸 채우기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덕분에 한국 영화계에는 이런 빈 칸 채우가 영화들이 많이 나온다. 실록에 실린 사건 묘사를 바탕으로 삼고 상상력을 통해 그 사건의 원인과 과정과 결과에 대한 이야기를 뽑아내는 것이 이러한 빈 칸 채우기 영화들이 제작되는 방식이다. 이런 영화들은 최대한 치밀하게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렇지 않으면 단순하게 실록 속 한 토막을 소비해버린 영화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화들은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장면들을 만들어내든지, 아니면 정말로 치밀한 각본으로 흠 잡을 곳이 없는 스릴러나 추리물을 만들어내든지 해야 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통상 빈 칸 채우기 영화들은 거의 대부분 아쉬움만을 남긴다. 아마 제작 목표 자체가 영화적 완성도보다는 대중들이 좋아할만한 감정선에만 맞춰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떤 장르든 시대극은 돈이 많이 들기에 투자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올빼미'도 아쉬움이 적지 않게 남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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