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을 영화로 각색한 각본에 5점 만점을 주어 보기는 처음이다. 그만큼이나 <그린 나이트>의 각본은 영화적이고 새롭다. 플롯도 각본이 가진 가능성을 최대한 발휘하게끔 짜여졌다. 장면과 촬영도 흠 잡을 곳이 없다. 사운드도 영화와 어울리면서도 충분히 현대적이여서 옛날 이야기를 각색한 영화를 보면서도 영화 자체가 옛스럽다고 느껴지지는 않게 만들어준다. 등장 인물들도 생생하다.
영화에 이렇게 좋은 이야기만 늘어놔본지가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알폰소 쿠아론(Alfonso Cuarón)이 감독한 2018년작 <로마>이후로 처음이지 않나 싶다.
이 영화가 14세기 서사시를 원작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영화를 보고 나와서야 알았다. 시작부터 늙어서 노쇠한 아더왕과 카멜롯이 나오지만 그저 아더왕 이야기의 스핀-오프(spin-off)작인가 싶었다. 그만큼 시작부터 영화가 뿜는 인상이 개성이 넘쳤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이 영화는 보면 볼수록 새로운 상상이 떠오르겠구나 싶었다. 그만큼 해석의 여지가 많은 영화이다. 감독인 데이빗 로워리(David Lowery) 역시도 언론사와 인터뷰를 하면서 그런 면을 언급하였다.
해석의 여지가 많은 영화는 위험도 크다. 스토리가 분명한 영화보다 도 더 정확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석하든 앞뒤가 맞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보통 영화들은 해석의 여지를 결론 정도에만 두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영화가 제공하는 해석의 여지는 그와는 차원이 다르다. 마치 레고처럼 어떻게 조립하든 하나의 작품이 되며 그 하나하나들이 모두 매력적이다.
이 영화는 대략적인 스토리라인을 미리 알고 보는 편이 좋다.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보니 모든 것이 다 새로운 정보라서 영화를 보는 내내 기억과 해석을 동시에 해야 했다. 적어도 이 글을 읽는 분들은 그런 고생을 하지 않기를 바라며 이 영화의 스토리라인을 적당히 정리해보겠다.
영화는 카멜롯의 크리스마스날로부터 시작한다. 주인공인 가웨인은 아서왕의 조카이며 왕족으로서 특권을 누리지만 아서왕과 교류는 거의 없이 살았다. 그런데 이번 크리스마스 연회에 아서왕이 가웨인을 불러다 옆에 앉힌다. 갑작스러운 왕의 호출에 가웨인은 당황하지만 왕은 가웨인에게 그동안 교류가 없었던 것을 후회한다며 가웨인에게 그가 왕족의 일원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그러면서 가웨인에게 서로 친해지려면 대화를 해야 하니 어떤 이야기든 해보라고 말하지만 별다른 일 없이 그저 놀며 지냈던 가웨인은 할 이야기가 없음을 느낀다. 이에 왕은 연회에 모인 과거 영광의 주인공들인 이제는 나이가 든 원탁의 기사들에게 어떤 이야기든 해달라고 말한다. 바로 그 때, 궁의 문이 부서질듯 열리며 말을 탄 거대한 형상이 나타난다. 바로 그린 나이트(green knight)였다. 그린 나이트는 '크리스마스 게임'을 제시한다. 누구든 나와서 자신의 어느 부위든 칼로 내리쳐라. 그러면 내가 가진 커다란 도끼를 그 사람에게 주겠다. 다만 그 사람은 1년 후에 나를 찾아와 똑같은 부위에 칼을 맞아야 한다. 이것이 게임의 내용이었다. 이 때 가웨인이 나서고 가웨인은 그린 나이트의 목을 사정없이 내려쳐 잘라버리고 도끼를 획득한다. 승리를 기뻐하려 할 즈음에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목이 떨어진 그린 나이트의 몸이 일어서더니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머리를 집어든다. 그리고는 1년 후 자신을 찾아와야한다는 약속을 다시 상기시키고는 만족스럽다는 듯 크게 웃으며 떠난다. 그리고 거의 1년이 지난다. 가웨인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린 나이트가 있는 곳으로의 여정을 시작한다. 여정 도중에 가웨인은 여러 일들을 겪으며 결국 그린 나이트가 머무는 곳으로 찾아가며 그곳에서 영화의 결말부가 진행된다.
대략적인 줄거리만 봐서는 그저 옛날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줄거리 안에 엄청나게 미묘한 장치들을 많이 설치한다. 그린 나이트가 등장하게 되는 과정, 가웨인이 여정을 떠나게 되는 과정, 그 와중에 겪는 일들, 그리고 결말부 등 모든 단계에서 이 영화는 온갖 장치들을 끼워넣는다. 어지럽다거나 정리가 안 된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영화적 장치들이 발견될수록 영화에 더 빠져들게 될 뿐이다.
영화는 가웨인의 여정의 시작과 과정 그리고 끝을 보여주면서 수많은 암시를 한다. 영화 시작부는 이 그린 나이트의 등장과 '크리스마스 게임' 모두가 이미 계획된 일이라는 암시를 주기도 한다. 아서왕은 늙었고 자식이 없다. 유일한 혈육은 가웨인이다. 하지만 혈육이라고 해서 무작정 왕위를 물려줄수는 없다.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영웅적인 업적을 세워야 한다. 이 '영웅의 고난'은 옛날 이야기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야기지만 이 영화에서 나오는 '영웅의 고난'은 다르다. 일단 가웨인은 '영웅'이 아니다. 가웨인은 초인적인 힘이나 능력을 가지지도 않았고 정신력이 남다르지도 않다. 능력상으로는 보통 사람에 가까운 가웨인은 여정을 겪으면서 고난을 헤쳐나가게 되고 새로운 경험과 지식을 쌓는다. 무기력해지기도 하고 수치심을 느낄만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약속을 깨기도 한다. 하지만 그린 나이트와의 약속만큼은 지키기 위해 계속 나아가고 결국은 그린 나이트를 1년만에 다시 만나게 된다.
이렇듯 영화의 밀도가 너무도 높다보니 이 영화는 킬링타임으로 보기에는 매우 부적합하다. <그린 나이트>가 갖지 못하는 유일한 영화적 요소는 '대중적 재미'이다. 인기영화가 되지는 못할 작품인 셈이다. 하지만 영화적 재미는 차고 넘치며 어마어마한 영화적 경험도 제공한다. 그야말로 영화적 역능(power)를 강력히 펼치는 영화이다. 영화적 역능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스크린에서 볼 수 있는 지금 기간을 놓치지 말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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