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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영화 Review

[볼거리] <화양연화> 다시 보기

by WritingStudio 2021.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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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화양연화>(2000) 에서

 

작년 말에 영화 <화양연화> 리마스터링 판이 개봉했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재개봉은 늘 반갑다. 게다가 리마스터링이라니. 가능한 빠르게 극장을 찾았고 그렇게 <화양연화>와 다시 만났다.

 

<화양연화>를 처음 봤을 때 느낌은 '영상이 너무도 아름답다'였다. <화양연화>는 스토리라인이 두드러지는 영화는 아니다. 수많은 영화에서 다루는 남녀관계 이야기를 <화양연화>도 다룬다. 남주인공의 아내와 여주인공의 남편이 불륜관계임을 남녀 주인공이 알게 되고, 그 속에서 그 둘의 관계도 점점 특별해진다. 영화 주제로서는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다. 그래서인지 <화양연화>의 스토리는 그리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왕가위 감독의 '미장센'에만 관심이 집중된다. 그리고 그 미장센은 너무도 훌륭하다. 집중적인 관심을 받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다.

 

하지만 궁금했다. 이 영화에 왜 <화양연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멋있기는 하지만 그리 어울리지는 않는 제목이라고 느꼈다. 무슨 의도였을까.

 

왕가위 감독은 이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가 감독한 영화에서도 드러나듯 그는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이어가면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아니다. 그는 매 순간순간에 느껴지는 무언가를 영상으로 담아내는 데에 집중한다. 개인적으로 왕가위 감독 영화 중 가장 스토리에 신경을 쓴 영화가 <아비정전>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비정전>역시도 사람들은 스토리보다는 장국영의 이미지와 순간순간의 장면들을 더 기억한다. 그만큼 왕가위는 영화적인 감독이다.

 

리마스터링 판본으로 재개봉한 <화양연화>를 보고 나서야 나름대로 영화와 제목의 관계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동안 궁금증을 꾸준히 간직했던 덕분이었다.

 

개인적으로 <화양연화>는 왕가위 감독의 이야기라는 결론을 내렸다. 왕가위 감독이 직접 경험을 한 이야기인지 상상으로 펼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매우 솔직한 고백록과 같은 영화였다. 말하자면 주모운(양조위)이 왕가위 감독이고, 소려진(장만옥)이 왕가위 감독이 그리워하면서도 지키고자 한 여성이었다. 이렇게 상상을 한 이유는 이 영화가 지닌 비현실성 때문이었다. 영상미에 잘 녹아들었기에 관객에게 불편함을 주지도 않고 억지스럽다고 느껴지지 않지만, 이 영화는 분명한 비현실성을 보인다.

 

<화양연화>의 배경은 1960년대 홍콩이다. 양조위와 장만옥은 모두 평범한 직장인들이다. 양조위는 신문사 편집기자이고 장만옥은 무역회사에서 비서로 일한다. 그 둘이 사는 동네는 허름하고 동네 사람들도 허름하며 가볍고 일반적이다. 영화 속에서 옷매무새가 단정한 사람은 주모운과 소려진 뿐이다. 그 둘도 차이가 크다. 주모운은 단정하긴 하나 늘 비슷한 톤의 옷만 입는다. 그러나 소려진은 귀부인한테나 어울릴만한 한 올 흐트러짐도 없는 치파오를 매일 입고, 그 치파오는 매일 바뀐다. 그 영상이 너무 아름답기에 관객들은 그 장면들을 영화적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장면들은 분명 드라마 장르 치고는 너무도 비현실적이다. 그리고 이는 의도된 비현실이다. <화양연화>가 기억을 담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주모운과 소려진의 행색은 아마도 그 동네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억을 다시 펼쳐낼 때에는 현실이 아닌 본인이 본 소려진을 그려야 하기에 영화 속 소려진은 화려하게 변신했다.

 

<화양연화>가 기억을 담은 영화라는 가정은 다른 장면들에서도 유추된다. 왕가위는 그 둘의 관계를 전적으로 플라토닉하게 그렸다. 심지어는 어느 정도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된 시점에서 한 방에서 밤을 지새워도 철저하게 플라토닉하다. 실제로도 그랬을까. 소려진을 지켜주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는 대사에서도 드러난다. 주모운과 소려진의 관계가 점점 가까워짐에 따라 좀 더 다가가려는 쪽은 늘 주모운이고 그때마다 흐트러지지 않고 선을 지키는 사람은 소려진이다. 쉽게 말해 비난을 받을 소지를 지는 대사는 다 주모운이 한다.

 

<화양연화>에서도 특별히 눈에 띄는 한 장면 이야기도 해보자. 영화 어느 시점엔가 몇 초 동안 빗속의 등불 하나만이 나온다. 굳이 비가 내린다는 사실을 오래 보여줄 필요도 없는 시점이었고, 그 등이 무슨 역할을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카메라는 꽤 오랫동안 그 한 장면을 응시한다. 상상을 해 보았다. 아마도 그 장면은 아주 사적인 기억 속 장면이 아니었을까. 그 모든 기억을 지닌 개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공간인 어떤 곳을 담아낸 것은 아닐까.

 

이 모든 상상의 나래가 <화양연화> 리마스터링을 보고 나오는 길에 펼쳐졌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화양연화'였다. 단순히 기억을 그린 것 뿐만이 아니라 그 기억을 한 여인을 위하여 다시 그려내었다는 사연이 추가가 된다면 그 이야기는 '화양연화'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물론 이 글 역시 개인적인 상상의 결과물이다. 왕가위 감독이 이 글을 읽는다면 '뭘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을 하고 그럽니까'라고 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재미있는 상상이군요. 그러한 상상 역시 관객의 권리이며 자유입니다'라고 말해줄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분명한 비현실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때는 언제일까. 꿈을 꿀 때 그렇지 않은가. 꿈에서 깨고 나면 꿈 속에서 그 장면들이 모두 현실이라고 믿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보면 <화양연화>는 꿈결같은 영화이다. 어쩌면 꿈보다도 강력한 영화이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영화의 비현실성을 떠올리기는 커녕 한동안 그 속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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