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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책을 읽은 뒤에

<노르웨이의 숲> -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by WritingStudio 2021.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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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직접 촬영

출판년도: 1987
저자: 村上春樹(무라카미 하루키)
원제: ノルウェイの森(노르웨이의 숲)
한국어 제목: 상실의 시대, 노르웨이의 숲

제목에 대한 이야기

1. 제목 번역에 얽힌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ノルウェイの森(노르웨이의 숲)>는 일본에서 1987년에 출판되었다. 1988년 한국어로 처음 번역되었을 때에는 제목도 그대로 <노르웨이의 숲>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거의 팔리지 않다가 1989년에 문학사상사에서 <상실의 시대>로 제목을 바꾸어 다시 출판하였고 대히트를 쳤다. 그런 이유로 한국에서만큼은 이 책 제목은 <상실의 시대>가 되어버렸다.

그가 쓴 소설들은 한동안 문학사상사가 독점 출판했기에 <ノルウェイの森>은 계속하여 <상실의 시대>로 출간되었다. 이에 관하여 나무위키를 통해 확인되지 않은 내용이 떠돌아 언급해보고자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번안한 제목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문학사상사에 제목을 바꿔 출간해달라는 요청을 했으나 문학사상사에서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이 없었으면 한국에서 지금의 하루키도 없었을 것이다라며 거절했다." - 나무위키 내용(2021.9.18 현재)

출처: 나무위키 '노르웨이의 숲' 검색결과 중(2021.9.18 현재)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출판사가 VIP 작가의 요청을 '이 제목이 아니었으면 한국에서 하루키도 없었을 것'이라는 고압적인 언사를 던지며 단칼에 거절했다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기사 검색을 해 본 결과 보다 더 그럴듯한 상황설명을 찾았다. 2013년 9월 작성되고 2016년 12월에 한 차례 수정된 뉴시스 기사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한편, '노르웨이의 숲'은 문학사상사가 펴내고 있는 '상실의 시대'와 나란히 판매된다. 앞서 문학사상사는 제목이 바뀐 것을 불편하게 여긴 무라카미의 요청으로 '노르웨이의 숲'으로 바꿔 출판했지만, 판매실적이 저조해 지금의 제목 '상실의 시대'로 되돌린 바 있다. (출처: 뉴시스 기사)

 

나무위키 내용보다는 뉴시스 기사 내용이 사실일 가능성이 더 높아보인다. 문학사상사가 출판한 <상실의 시대>는 초판 발행일이 1989년 6월 27일이다. 초판 표지를 검색하여 찾아보면 <상실의 시대> 밑에 "원제 -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문구가 보인다. 애초부터 원제를 아예 무시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아마도 그 후 책이 잘 팔리자 무라카미 하루키 측에서 '이제 책 제목을 원제대로 가도 되지 않겠냐'고 요청을 했고 문학사상사도 일단 이를 수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제목을 바꾼 후에 판매가 저조해지자 다시 <상실의 시대>로 제목을 바꾸었을 가능성이 더 높아보인다.

현재 출판시장에서는 <상실의 시대>와 <노르웨이의 숲> 두 책이 모두 유통된다. 문학사상사에서는 계속 <상실의 시대>를 주 제목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그 외 출판사들에서는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을 쓴다.

2. 원제 자체에 얽힌 이야기

비틀즈(Beatles) 곡인 'Norwegian Wood'가 일본에 알려졌을 때 'Wood'를 '숲'으로 번역해 일본어 곡 제목이 'ノルウェイの森[노루웨이노모리](노르웨이의 숲)'가 되었다. 후에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가 "'wood'는 숲이 아닌 나무, 혹은 나무 가구라는 뜻이 맞다"고 하였기에 이는 오역이 되었다(하지만 주 저작권자인 존 레논(John Lennon)은 "왜 'Norwegian Wood'라는 제목을 쓰게 되었는지는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를 두고 무라카미 하루키가 번역을 잘못하여 제목을 잘못지었다고도 말하는데 이는 잘못된 말이다.

오역이라 하더라도 이미 그 제목이 일본 전체에 퍼진 상황에서는 다시 돌이킬 방법은 없다. 일본인들에게 'Norwegiwn Wood'는 너무도 확고부동하게 'ノルウェイの森'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ノルウェイの森'을 일본어 제목으로 쓴들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소설 속 인물들이 그 곡을 '노르웨이의 숲'으로 알며 지내고 또 '숲'에 대한 중요한 기억을 공유한다면 '노르웨이의 숲'은 <노르웨이의 숲>에 딱 알맞은 제목이 된다. 오히려 곡 제목이 오역되어 일본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고맙기도 하다. 그 덕분에 <노르웨이의 숲>과 같은 소설이 나왔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애초에 영어 실력이 상당한 사람이다. 곡 제목이 오역이 되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그저 오역된 곡 제목이 소설과 잘 맞아떨어져서 선택을 했을 뿐이다.

작품 이야기

<노르웨이의 숲>은 만 37세가 된 주인공 와타나베 토루가 탄 비행기가 독일 함부르크 공항에 착륙해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와타나베 토루는 무라카미 하루키 본인을 소설화한 인물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1949년생이다. 그리고 1985년에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쓰고 86년에 유럽에 간다. 무라카미 하루키 나이 만 37세 때이므로 함부르크 공항에 착륙하는 주인공 와타나베 토루와 정확히 같은 나이다. 왜 독일이고 왜 함부르크 공항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다만 그 첫장면이 어색하지 않고 진실되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작가가 솔직하게 쓴 장면이라서가 아닐까 싶다.

함부르크에 착륙하려는 비행기에서 비틀즈의 곡 <노르웨이의 숲>을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번안한 곡이 흘러나오고 그 곡은 와타나베의 깊고 분명한 기억 뭉치 하나를 꺼내어서 터뜨린다. 그 기억을 시작으로 이 소설의 본 내용이 전개된다. 만 37세의 와타나베는 그 이후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노르웨이의 숲>은 와타나베가 만 열 일곱 때부터 대학 3학년 쯤이 되는 그 사이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소설이다. 주인공은 와타나베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과연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든다. <노르웨이의 숲>에 와타나베 이야기는 별로 없다. 그는 매개체에 가깝다. 우리는 와타나베가 주인공인 소설을 통해서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로 듣는다. 극중 주요 인물인 나오코, 미도리, 나가사와, 하쓰미, 레이코 등과 비교하여보면 와타나베가 가장 특징이 없다. 소설 속 와타나베도 "나는 그저 보통의 사람일 뿐이지"라고 말한다. 자기 이야기도 별로 하지 않는다. 물론 소설 한 권 분량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인물이니 완전히 보통 사람일 리는 없다. 다만 주변 인물들보다는 사연이 적다. 나오코는 극심한 정신불안에 빠진 상태이고, 미도리는 겉으로는 쾌활해보이지만 온갖 집안 사정으로 인해 머리가 복잡하고, 나가사와는 엘리트지만 내면인 기괴하고, 나가사와의 애인인 하쓰미는 그런 나가사와 때문에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고, 레이코는 나오코도 정신적인 트라우마를 견디며 살아간다. 와타나베만이 기숙사에서 하루하루 기숙사 생활을 하고 방학 때면 아르바이트를 하여 얼마간 생활비를 벌고 수업에 다니며 학교생활을 한다. 와타나베의 특징이라면 솔직함과 쉽게 단정짓지 않는 성격이다. 그렇기에 그는 누가 어떤 이야기를 하여도 마음대로 판단을 하거나 충고를 하거나 하지 않는다. 아마도 소설 속 와타나베 주변 인물들은 와타나베에게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솔직한 이야기를 하지 못할 것이다. 웬만한 사람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다가는 이상한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힐테니 말이다.

화자가 주인공이지만 주인공이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장면은 그리 많지 않은 소설. 이것이 <노르웨이의 숲>이 매력적인 이유 중 하나이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와타나베와 관련한 중요한 사실 나오코와 미도리에 대한 진심, 그것 하나이다. 어떤 생활을 하든 어떤 경험을 하든 와타나베의 머릿속에는 나오코가 자리하고 미도리에게 향하는 마음 또한 진심이다. 그래서 와타나베는 괴로워한다.


<노르웨이의 숲>의 또 다른 매력은 솔직함이다. 원색적인 표현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일부러 이야기를 자극적으로 만드려는 목적은 없음이 분명하게 느껴진다. 그저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갔을 뿐이고 그런 장면으로 이어졌을 뿐이다. 억지스럽지가 않다. 특이한 질문들과 특이한 답변들도 그 의외성에도 불구하고 인위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진지하게 고민을 해보니 그런 질문이 나왔고 그런 대답이 나왔을 뿐이다.

솔직하기에 문장도 담백하고 간결하다. <노르웨이의 숲> 바로 전작인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는 완전히 다른 필체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극도로 빡빡하다. 아주 치밀하게 짜여진 플롯을 바탕으로 문장들이 빽빽하게 꽂힌다. 문장을 따라가다보면 책장을 넘기는 손과 글을 읽는 눈에도 함께 힘이 들어간다. 그만큼 꽉 눌러 쓴 소설이다. <노르웨이의 숲>은 완전히 다르다. 우선 공간이 많이 느껴진다. 글이 바쁘지 않고 여유롭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쓴 사람이 그 바로 다음에 썼다고는 잘 상상이 되지 않는 소설이다. 게다가 현실주의 소설이다. 그가 쓴 소설들 가운데 <노르웨이의 숲>을 제외한 소설들은 판타지적인 요소를 갖는다. 최근 장편인 <기사단장 죽이기>도 그렇고 방대한 분량으로 나왔던 <1Q84>, 큰 인기를 끌었던 <해변의 카프카>도 모두 판타지적인 소설이다. 완전한 현실세계 이야기는 <노르웨이의 숲> 뿐이며 그렇기에 이 소설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중 가장 개인적이고 가장 솔직며 가장 예외적이다.

<노르웨이의 숲>이 지닌 매력이 위에서 언급한 것들 뿐이라면 이 소설이 문학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며 무라카미 하루키도 노벨 문학상 후보로까지 거론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소설이 자아내는 그 시대에 대한 느낌이자 색깔이 <노르웨이의 숲>을 뛰어난 문학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1949년생이다. 일본에 원자폭탄 두 개가 떨어지고 일본이 무조건적인 항복을 한 해가 1945년이다. 물론 그 후로 일본이 가난의 길을 걷지는 않았다. 1950년 한국에서 6.25가 발발하면서 일본은 군수물자 사업으로 돈을 번다. 그 후 60년대에는 고도성장을 하면서 경제 규모는 세계적인 수준이 된다. 하지만 이는 화폐단위로 표현되는 수치일 뿐 사회적 분위기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한국의 1980년대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국민소득과 수출 규모가 늘어간다는 뉴스가 연일 터지지만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밝은색은 아니었다. 개인과 인간다움보다는 경제발전이 우선이었고 야근과 과로는 훈장이 되던 시대였다. 일본은 한국보다는 출발점이 높았기에 그정도는 아니었겠지만 분명 겹치는 부분이 있었으리라 본다. 50년대 일본도 우익 정치인들이 '일본재부흥'을 주창하였을 것이고 젊은이들에게 개인의 가치보다는 국가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라고 강조하였을 것이다. 당시 일본은 한국처럼 가난하지는 않았기에 80년대 한국처럼 생각할 겨를도 없는 분위기는 아니었을 듯하다. 민주화운동도 필요없었다. 패전과 동시에 일본을 실질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한 미국에 의해 정치 체제는 시작부터 민주주의로 자리잡혔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의 20대들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생각이 많아지고 혼란스럽지 않았을까.

무라카미 하루키가 본 그 시대의 색깔은 회색빛이었던 것 같다. 여기서 회색은 '시대, 정치가들, 학생운동가들이 하는 말이나 행동이 별 의미가 없다'는 뜻에 가깝지 않나 싶다. 와타나베의 성격도 꽤나 염세적인 동시에 절대로 긍정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좋게 말하면 판단 보류형이지만 어찌보면 회색형이다. 그저 나름대로 고민하고 관찰하고 소소한 판단을 하고 남들 이야기를 들어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대학생이다. 그런 주인공을 매개체로 삼아 전달되는 여러 인물들의 여러 이야기들도 모양과 성격은 가지각색이고 생생하지만 색깔만큼은 회색이다. 그리고 허전하다. 이 '허전함'도 <노르웨이의 숲>이 가진 또다른 특징이다. 읽다 보면 쓸쓸한 바람 소리가 계속 들린다. 그리고 우리는 그 독특하고 허전한 느낌에 끌린다. 1970년 근처에 일본 대학생이 된 느낌을 받게 된다. 와타나베가 사는 어딘지 모르게 우익적인 기숙사, 알맹이 없는 일본 대학생들의 시위,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삶, 태어날 때부터 상처를 갖고 태어난 느낌,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어떤 시대를 만든다. 한 시대의 느낌을 이렇게 그려내는 소설은 거의 없다. 그리고 그 거의 없는 소설들이 주로 문학의 반열에 오른다.

출간이 된 지 30년도 넘은 이 책을 요즘에도 가끔씩 펴보곤 한다. 특정 문장이나 내용이 생각나서가 아니다. 이 책의 모든 문장에 칠해진 그 '회색빛'과 '바람소리'가 이따금씩 생각나서이다. 그런 것들이 왜 떠오르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기분이 조금은 씁쓸해지면서 <노르웨이의 숲>을 또다시 천천히 읽어나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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