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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책을 읽은 뒤에

젊은 베르터의 고통(Die Leiden des Jungen Werther)

by WritingStudio 2021.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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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원서는 언제 읽게 될지 모르겠다.

맘편히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시대라서 그런지 여행을 떠날 때 지니고 다니는 책들이 자꾸 생각난다. 물론 다들 알다시피 이 책이 여행 얘기를 하지는 않는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가 처음 해외 여행을 떠났을 때였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의 한국어 제목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안다. 우선 여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이 책의 독일어 원제는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이다. 'Die'는 보기만 해도 감이 오듯 영어의 'The'에 해당하는 정관사이다. 'Leiden'이 중요하다. 독영사전을 찾아보니 'Leiden'은 'suffer(고통스러워하다)', 'endure(견뎌내다)', 'bear(감내하다)'로 번역된다. 그리고 영어권에서는 이 책의 제목을 <The Sorrows of Young Werther>라고 지었다. 'sadness', 즉 '슬픔'이 아니다. 영어에서 'sorrow'는 'sadness'보다 훨씬 더 강하고 지속적인, 슬픔보다 훨씬 더 세고 깊은 감정을 말한다. 그러니 'sorrow'는 슬픔'보다는 훨씬 센 표현이다. 이를 단순히 '슬픔'이라고 번역한다면 너무 약하다. 책 내용상으로 봐도 베르터가 겪는 감정들을 표현하는 단어로 '슬픔'은 너무도 부족함이 많다.

'Werther'를 '베르테르'라고 표기한 부분도 지나치게 일본식이다. McDonald를 '마그도나루도'라고 읽는 셈이다. 여행을 다닐 때 한 번은 독일 여행객을 만났다. 대화를 나누다가 괴테 얘기가 나오게 되었고 당연히 'Werther' 얘기도 나오게 되었는데, 버릇처럼 '베르테르'라고 발음했더니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종이에 철자를 적어서 보여주었더니 그 독일 여행객은 이게 어떻게 '베르테르'가 되냐며 독일어로 발음을 했다. 나는 독일어는 전혀 하지 못하지만 들리는 발음상은 '베르터'에 훨씬 가까웠다.

이 문제점들을 인지한 을유문화사가 2010년에 이 책을 다시 번역하면서 한국어 제목을 <젊은 베르터의 고통>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이 책을 너무도 소중하게 여기는 한 사람으로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보다는 '젊은 베르터의 고통'이 훨씬 바람직한 제목이라고 생각하기에 이 글 제목도 '젊은 베르터의 고통'이라고 하였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느낀 놀라움은 아직도 상당히 생생하다. 한 줄 한 줄이 새로웠다. 이런 감정을 이토록 지적이면서 순수하게 표현한 문장을 그 전에는 보지 못했다. 고대 서사시나 <돈키호테>같은 책에서도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구절들이야 흔히 봤지만 그 문장들은 멋지거나 강렬하긴 해도 심하게 과장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젊은 베르터의 고통>이 쓰는 문장은 달랐다. 과장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그 진심이 너무도 강렬했을 뿐이었다. 이 책을 여러번 읽으면서 어느 순간인가 '다른 사람 눈으로 본 샤를 로테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싶었다. 물론 누가 보아도 매력적인 여성이었음은 틀림이 없어 보였다. 다만 베르터가 말하든 그렇게 온갖 미덕을 갖춘 사람이었을까? 그럴 수도 있다. 다만 샤를 로테의 미덕과 매력을 세상 누구보다도 상세하게 발견해낸 사람이 베르터였음에는 틀림없다.

샤를 로테를 향한 베르터의 사랑 이야기가 이 책의 전부였다면 나도 이 책에 그렇게까지 빠져들지는 못했다. 이 책에는 세상 누구보다도 지적이면서도 인간적이며 가슴이 뜨거운 한 젊은이가 담겼다. 괴테는 후에 이 책을 언급하면서 '위험한 불장난'이었으며 이 책을 단시간에 매우 빠른 속도로 써내려갔다고 말한다. 괴테는 1749년 생이며 이 책은 1774년에 나왔다. 당시 괴테 나이 25세였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내 나이가 괴테가 이 책을 쓴 나이였다. 시대적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25세 젊은이가 쓴 책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웠다. 뜨거운 감정 뿐만이 아니라 삶과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베르터, 즉 괴테는 갖췄다. 다만 그 날카로운 통찰을 날카롭게 쓰지 않고 따뜻함으로 덮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를 문장으로 표현해내었다. 놀라운 문장들의 연속이 아닐 수가 없다.

책 중간에 어떤 마을에서 사랑했던 남자에게 버림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소녀의 이야기가 나온다. 다른 사람들은 그 소녀가 조금만 더 참고 견뎠으면 자살에 이르지는 않았을텐데 하는 의견을 내지만 베르터는 이에 반대한다. 이 장면은 두 가지 의미에서 중요하다. 첫 번째는 베르터가 소녀를 위해 한 말 자체가 아름답기 때문에 중요하고, 두 번째로는 그 말 속에 베르터의 마지막이 암시되기 때문에도 중요하다. 베르터는 그 소녀의 자살은 참을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미 어떤 감정에 빠져든 사람에게 그 감정에서 빠져나오라는 주문은 불가능을 강요하는 것이라 베르터는 말한다. 그 소녀가 한 행동은 그 소녀에게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베르터는 그 소녀를 마음 깊이 이해한다. 베르터 본인의 운명을 예견하듯이.

같은 책을 사진처럼 여러 권을 사게 된 이유는 번역 때문이었다. 번역을 잘못했다는 말이 아니다. 이 책이 선택한 형식과 책을 채운 문장들 자체가 한국말로는 번역을 하기가 힘들다. 이 책은 절대 다수가 베르터가 친구인 빌헬름에게 보낸 편지로 구성된다. 편지글은 한국어로 표현하기가 참 힘들다. 게다가 베르터가 쓴 편지들은 단순한 젊은이 같지가 않다. 그러니 마냥 가벼운 한국어로 번역할수는 없다. 어느정도 격조가 느껴져야 하는데 또 너무 옛날 어투를 쓰면 분위기와 맞지 않는다. 결론적으로는 이 책은 한국어로 제대로 번역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책이다. 문장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 느낌을 살리기가 어려워서이다. 그래서 각기 다른 어투로 번역한 여러 권의 책을 사서 읽었다. 그렇게 해서 나름대로의 종합적인 느낌을 만들어보았다. 성과가 없지는 않은 시도였지만 크게 만족스럽지는 못했다.

그 결과 결국은 독일어 원서를 사게 되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아직도 읽지 못한 상태이다. 나는 독일어를 하나도 하지 못한다. 언젠가 한 번 큰 마음을 먹고 두 페이지 정도를 독영사전을 펼쳐놓고 혼자서 독파 시도를 했는데 세 페이지를 보는데 하루가 다 갔다.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성과는 얻었다. 원서의 아주 작은 부분을 읽어냈을 뿐이지만 원서로 읽었을 때의 느낌이 어떤지가 대략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시도를 할 것이고, 그 언젠가에는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를 읽고 후기를 쓰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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