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놉(Nope)은 조단 필(Jordan Peele)이 연출한 세 번째 영화이다. 원래 배우로서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던 그는 2017년 영화 겟 아웃(Get Out)을 통해 감독으로 데뷔했다. 겟 아웃은 그동안 어떤 영화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섬뜩하면서도 매력적인 이미지를 담아내어 관객과 평단 모두에게 찬사를 받았다. 그가 감독한 두 번째 영화인 2019년 개봉작 어스(Us)는 좀 더 혼란스러운 영화였다. 겟 아웃과도 연결성이 비치는 영화로 심리적으로나 시각적으로나 상당히 강렬한 장면을 보여주었다. 개인적으로 어스는 속편이 필요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올해 조단 필 새 영화가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겟 아웃과 어스를 잇는 작품이 나올줄 알았다. 놉이라는 영화 제목에서도 전작들과 내용면에서도 이어지겠구나 하는 뉘앙스를 받았다. 놉이 그런 영화가 아니라는 사실은 극장에서 영화가 시작되기 직전에야 알았다.
놉은 완전히 새로운 영화였다. 조단 필 영화로서 새로운 영화일 뿐만아니라 전체 영화 중에서도 놉 만큼 새로운 영화는 극히 드물다. 조단 필은 겟 아웃과 어스에서도 본인이 지닌 독특한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했지만 놉만큼은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영화를 구상을 하고 각본을 짜고 연출을 해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최근 본 영화 기준으로는 그린 나이트(2021) 이후로 처음 느껴보는 놀라움이었다. 놉과 그린 나이트는 결이 다른 영화이다. 그린 나이트는 각색과 절묘하게 배치된 영화적 장치들이 놀라운 영화였고 놉은 의도와 상상력과 결과물 자체가 놀라운 영화였다. 다만 그 놀라운 강도가 비슷한 수준이었다는 얘기다.
극장에서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기가 무섭게 앞자리에 앉은 관객이 분통을 터뜨린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싶은거야?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하나도 모르겠잖아!" 분위기를 보아하니 말로는 안 해도 속으로는 그 관객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아보였다. 그럴만도 하다. 놉은 관객을 위한 영화라기보다는 감독 본인을 위한 영화이다. 그렇다고 해서 관객을 무시하는 영화인가 하면 절대로 그렇지는 않다. 조단 필 감독은 이 영화가 어떤 영화이고 어떤 소재를 중심으로 다룬다는 힌트를 영화 시작점부터 매 순간마다 집어넣었다. '자, 나를 즐겁게 해 봐라'라는 자세로 영화를 보면 보이지 않는 힌트들이다. 그렇게 보면 놉은 감독과 관객 간 상호 이해가 필요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무엇을 찍은 영화인지 이해하지 못한 관객에게는 놉은 혼란 그 자체이다. 갑자기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어느 순간 UFO처럼 보이는 물체가 발견된다. 그런데 알고보니 UFO가 아니라 UFO처럼 날아다니는 생명체였으며 이 생명체는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다른 생명체들을 잡아먹는다. 이런 스토리면 보통은 그 괴물체를 공격해서 죽이고 주인공이 살아남는 내용이 주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주인공들은 그 생명체를 없애는 것보다 그 괴생명체를 어떻게든 카메라로 찍어내는 데에 목숨을 건다. 괴생물체가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이 클라이막스가 아닌 부수적인 장면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이 영화를 단순 괴생명체 SF 영화로 받아들인다면 '뭐 이런 영화가 다 있어?'라고 할 만하다.
놉은 영화 촬영에 미친 사람들을 다룬 영화이다. SF라는 장르와 괴생물체는 이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는 주인공이 괴생물체를 느끼고 발견하는 그 시점에 극명하게 드러난다. 보통 영화라면 생명을 위협하는 거대한 괴생물체를 인지한 순간 가능한 방법을 총동원해서 구조를 요청한 후에 주인공이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을 치거나, 아니면 어떤 방식으로도 구조를 요청할 수가 없는 상황에서 주인공이 기지를 발휘하여 괴생물체를 처치하는 내용으로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놉은 다르다. 이들은 오히려 '이 괴생물체의 존재가 알려져서 사람들과 방송인들이 몰려들면 끝'이라고 말한다. 그 전에 자신들이 이 괴생물체를 카메라에 담으려 한다. 심지어는 이 괴생물체를 처치하는 것보다도 카메라에 담는 것이 우선이다. 영화 촬영에 미쳐도 단단히 미친 사람들이다.
클라이막스 장면 또한 특이하다. 클라이막스 장면에서는 주인공 OJ가 등장하지 않는다. OJ와 에메랄드가 괴생명체 촬영을 위해 섭외한 촬영감독 홀스트(Holst)가 영화 클라이막스를 장식한다. 영화 속 괴생물체는 등장과 동시에 강력한 자기장을 방출하여 전자기기들을 무용지물로 만든다. 그래서 디지털카메라와 핸드폰 등으로는 촬영을 하지 못한다. 이 상황에서 홀스트는 수동으로 작동하는 IMAX 필름 카메라를 들고 온다. 그리고 끝내는 괴생물체를 담아내는 데에 성공한다. 하지만 홀스트는 이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괴생물체 입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장면을 촬영하고자 카메라를 작동시키면서 괴생물체에게 잡아먹힌다. 그에게는 목숨보다 '불가능한 장면'을 잡아내는 일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는 이 장면이 클라이막스였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놉은 불가능한 장면을 찍어내려는 영화인들의 집착과 광기를 다룬 영화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동물들인 침팬지, 말, 그리고 괴생물체는 모두 완벽한 제어가 불가능한 대상이다. 영화를 보고 나니 그 동물들, 특히나 그 거대한 괴생물체는 감독이 담아내야 하는 배우들을 영화적 상상력을 동원해 엄청나게 극화시킨 결과물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 홀스트는 에메랄드에게 "영화 한 편을 그들을 위해 찍고, 또 나를 위해 찍는다"고 말한다. 영화는 투자 없이는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렇기에 엄청나게 유명한 영화 감독이 아닌 이상에야 투자자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자신이 찍고 싶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도움을 받았으니 그들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영화 감독이라면 마음 속 무게 중심은 '내가 찍고 싶은 영화를 찍는 것'에 실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렇게 대중 눈치를 안 볼 수가 있나?'하는 생각에 놀랐다. '남들이 뭐라건 난 이번엔 내가 표현하고 싶은걸 표현할거야'라는 고집이 영화 내내 보였다. 그 결과, 상영관을 빠져나가는 관객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속에서 '이거 대체 뭐야?', '뭔 얘기를 하는거야?' ,'저 해파리는 뭐야'라는 말소리를 심심찮게 듣게 되었다. 이거 흥행에는 참패한거 아닌가 하는 걱정에 영화 흥행 정보를 보니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엄청난 박스오피스 성적을 이미 거둔 상태였다.
영화 놉은 소재와 표현 방식과 형식 모든 면에서 새로움을 느끼게 해 준 영화였다. 무조건적으로 관객을 즐겁게 해주는 영화를 즐기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영화를 이해하는 즐거움을 주는 영화도 보다 널리 받아들여졌으면 싶다.
평점: 4.5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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