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이브 마이 카. 이 영화를 보러 가기란 쉽지 않았다. 퇴근하고 보기 적당한 시간대의 직장 근처 상영관을 찾았지만 두어 번 정도 취소했다. 세 시간짜리 영화였기 때문이었고, 꽤나 집중을 해서 봐야 하는 영화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퇴근 후 컨디션으로 보기에 적당한 영화는 아니었다. 그래서 주말 상영관을 찾았지만 주말에는 어떤 극장이든 많은 사람들이 찾을 만한 영화를 우선적으로 상영한다. 칸 영화제 각본상 수상작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영화는 아니다. 다행히 집에서 멀지 않은 명필름 아트센터가 이 영화를 꾸준히 상영하는 중이었다.
이 영화가 칸 영화제 각본상 수상작이라는 사실도 우연하게 알았다. 하마구치 류노스케라는 감독 이름도 생소했다. IMDB 사이트에서 이 감독의 필모그라피를 찾아봤다. 내가 본 영화는 없었다. 왓챠를 보니 이동진 평론가가 5점 만점을 주었다. 취향이 비슷한 전문 평론가의 평은 나 같은 회사원이 영화를 고르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된다. 영화 포스터를 보니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이 원작이다. 하루키 장편은 거의 다 읽었지만 '드라이브 마이 카'라는 제목은 생소했다. '여자 없는 남자들'. 아, 단편집이구나.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헤밍웨이도 1927년 '여자 없는 남자들(Men Without Women)'이라는 단편집을 냈다. 단편소설을 딱히 싫어하거나 하지는 않는데 단편소설집에는 이상하게 손이 잘 가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 나서 하루키와 헤밍웨이의 '여자 없는 남자들'은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 경험을 하고 여러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경험과 감정은 늘 친절하지만은 않다. 때로는 겪기 싫은 일도 겪게 되고 보고 싶지 않은 장면도 보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여러 감정 변화 속에서 살아간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몸 안 어딘가에 그 경험과 감정으로 인한 마음이 쌓인다. 어떤 마음은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나고 전해지지만 어떤 마음은 일부러 드러내지 않고 숨기기도 한다. 어떤 마음은 전하고 싶어도 전해지지 않는다. 어떤 마음은 누군가 다가와서 꺼내어주지 않으면 도저히 나오지 못하기도 한다. 이 영화는 이런 마음들을 다룬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인 카후쿠는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를 연출하고 직접 바냐를 연기하기도 한다. 카후쿠는 아주 실험적인 연출을 한다. 여러 나라 배우들을 캐스팅하고 그 배우들 각자의 모국어를 그대로 대사로 쓴다. 배우들도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연기를 해야 한다. 불가능에 가까워보이는 이 연출 방식대로 연극을 연습해 나가는 과정은 이 영화 속 이야기와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언어는 서로 다르지만 배우들은 연극 연습을 하면서 서로 무언가를 느껴 나간다. 그 공감은 깊은 연기로 이어지고 결국 카후쿠는 이 실험적인 연극 연출을 성공적으로 마친다.
카후쿠는 아내를 사랑한다. 그와 동시에 남편으로서는 감당해내기 힘든 아내의 비밀도 안다. 그는 그 비밀을 애써 모른 척 한다. 어느 날 아내는 카후쿠에게 할 말이 있다고 말한다. 그 할 말이 아내의 비밀과 관련되었다고 느낀 카후쿠는 진실을 마주하기가 두려워 대화를 그 날 저녁으로 미룬다. 그리고 그 대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카후쿠는 아내를 떠나보내게 된다.
이 영화는 카후쿠가 아내와의 일로 얻게 된 마음의 상처를 극복해나가는 내용을 담는다. 치료가 아니라 극복이다. 마음의 상처는 누구든 혼자서는 극복이 되지 않는다. 카후쿠는 연극 연출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 중 중요한 인물이 카후쿠의 차를 대신 운전해주는 운전수인 와타리다. 상처투성이 마음을 가진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어색하고 무겁기 그지없지만 점차 상대방을 알아가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그 둘은 서로를 통해 서로의 상처를 극복해낸다. 삶을 살아가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원자폭탄을 맞아 폐허가 되었던 도시인 히로시마가 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폐허가 되었던 그 도시에서도 사람들은 살아갔고 지금도 살아간다. 영화 속 주요 인물들인 카후쿠와 와타리, 그리고 카후쿠의 아내의 마음도 히로시마와 같은 일을 겪었다. 카후쿠의 아내는 죽었지만 카후쿠와 와타리는 살아있다. 그리고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는 살아감, 살아냄에 대해서 말을 한다.
이 영화가 남긴 여운은 짙고 길었다. 극장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영화에 대해 생각했다. 라디오에서는 DJ가 신청곡으로 들어오는 인기 가요들을 흥겹게 따라 부르면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무슨 프로그램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노래방에서 노는 모습을 중계하는 듯한 정신없게 흥겨운 프로그램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듣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겠지만 오늘만큼은 그 소리도 나름대로 살아가는 모습 중 하나처럼 느껴졌다. 물론 기본적으로 좋아서 하는 일이겠지만, 사람 기분이 어떻게 날마다 흥겹기만 할 수가 있을까.
우리는 할 수밖에 없는 일을 하고, 잠깐씩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운이 나면 잠시 즐기고 싶은 것을 즐기며, 그렇게 살아간다. 운이 좋다면 하고 싶은 일이 주가 되고 즐기고 싶은 것들을 보다 마음껏 즐기며 살겠지만 이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다. 물론 그 방향을 향해 노력은 할 수 있다. 하지만 노력해도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게다가 세상에는 정말로 어떻게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있다. 이런 세상에서 정답이란 어디에도 없다. 그저 살 길을 찾는 수밖에.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는 이에 대해 답을 내리거나 어떤 삶의 방식을 강요하거나 하는 영화는 아니다. 그랬다면 이 영화가 좋은 영화가 되기란 불가능했다. 이 영화는 다만 삶에 대해, 우리들이 살면서 겪는 일들에 대해, 마음 때문에 일어나는 괴로움과 고민에 대해, 말의 힘과 한계에 대해, 공감과 이해에 대해, 그 모든 인간적인 것들에 대해 나름대로의 생각에 젖어들게 만들어 준다. 영화적이고도 인간적인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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