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 탑(2022)

홍상수 감독 영화를 보러 갈 때에는 기대와 걱정이 동시에 든다. 익숙함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해야 할까, 지향점과 표현 방식이 비슷해 보이는 영화가 연달아서 나오는 일이 흔하기 때문이다. 그 익숙함도 매력적이기에 다시 극장으로 가면서도 조금은 덜 익숙한 작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같이 든다.

그런 면에서 '탑'은 새로웠다. 이번에는 홍상수 감독이 관찰한 외부 무엇인가가 아닌 스스로를 관찰한 영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탑'이라고 표현되는 영화 속 건물은 해옥(이혜영)이 소유한다. 오랜 별거 생활 중인 영화 감독 병수는 그 건물에 5년만에 만난 딸 정수(박미소)를 데리고 간다. 미술을 전공했던 정수가 미술에는 흥미를 잃고 실내 인테리어에 관심을 보이자 그 분야 전문가인 해옥을 딸에게 소개시켜주기 위해서였다.

해옥, 정수, 병수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병수에게 일과 관련된 전화가 걸려오고 병수는 해옥과 정수만 두고 곧 돌아온다며 자리를 떠난다. 병수가 없는 자리에서 정수는 해옥에게 아버지에 대한 사적인 이야기를 한다. 영화 속 정수는 유명 영화 감독인 병수가 집에서 보이는 모습은 외부에 보이는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는 면을 폭로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해옥은 '집 안에서 보이는 모습만이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관점'이라며 병수 편을 든다.

해옥이 소유한 그 3층 짜리 건물에서 병수(권해효)는 여러 모습과 욕구와 내면을 내보인다. 지하, 1층, 2층, 3층, 옥탑으로 이루어진 그 건물에서 유일하게 공개되지 않는 공간은 지하이다. 해옥은 작업실이라 부르는 지하는 사실상은 자신이 쉬는 공간이라며 병수에서 언제 한 번 지하 작업실에서 술을 한 잔 하자고 말한다. 하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결국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병수는 해옥이 소유한 건물에서 해옥이 아닌 해옥이 아는 두 여성과 차례로 만난다. 첫 여성은 2층에 세 들어 레스토랑을 운영하던 선희이다. 병수의 영화를 너무도 좋아하는 선희는 2층에서 같이 와인을 마시며 서로에게 관심을 보이고 바뀐 장면에서 그 둘은 동거 생활을 한다. 해옥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자기한테 온 우편물인줄 알고 뜯어봤다'면서 갑작스럽게 우편물을 전달해주러 오곤 한다. 그리고 해옥은 선희 가게가 장사가 잘 되지 않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월세를 올리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선희는 병수가 좋지 않게 생각하는 친구를 만나러 가고 병수는 선희를 기다리다 지쳐 침대에 누워서는 '나는 혼자 살아야 하는 사람이야'라고 말한다.

장면이 또 바뀌고, 이제는 옥탑방이다. 병수는 옥탑방에서 '혼자' 살면서 부동산 중개인인 지영(조윤희)과 연애를 한다. 해옥은 그 모습 또한 질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여전히 '자기한테 온 우편물인줄 알았다'면서 우편물을 전달하러 갑자기 나타나고, '지영은 이 집에 왜 맨날 오냐'며 추궁한다. 병수는 그런 해옥에게 '신경쓰지 말라'는 말도 못한다. 그럴 입장이 아니기 때문이다(아마도 해옥은 병수에게는 월세도 안 받는 것 같은 분위기다). 병수는 해옥의 추궁을 어떻게든 좋게좋게 받아 넘긴다.

동거 생활과 연애 생활을 통해 보여지는 병수의 모습은 그야말로 날것 그대로이다. 건강은 계속하여 나빠지고, 영화 활동도 접은 지 오래 되었다. 병수는 그저 제주도로 내려가서 영화 활동을 다시 시작하고 싶어하지만 여러 환경상 여의치가 않다. '종교란 사람들이 겁이 나서, 두려워서 만든 것'이라고 말하던 병수는 이제 자신이 하나님을 본 경험을 했다며 '하나님이 나에게 제주도에 가서 영화 열두 편을 찍으라 하셨다'고 말한다. 하지만 제주도로 떠나는 일은 요원해보이며, 병수는 여전히 해옥이 소유한 그 건물에서, 건물주인 해옥의 영향권 아래에서 힘없는 생활을 계속 해 나간다.

영화에서는 병수가 건물을 벗어나는 장면이 두 번 나온다. 정수와 해옥을 두고 영화 관계자를 만나고 오겠다며 건물 밖을 나서서 차를 타고 떠나는 장면이 첫번째인데, 결과적으로 병수는 그 건물을 떠나지 못했다. 병수는 건물을 나와 차를 타고 다른 곳으로 간 듯 보이지만 결국은 (시간 흐름이 초현실주의적이기는 하지만)그 건물 2층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곳에서 선희를 만나 3층에서 동거를 하다 헤어지고, 곧이어 한 층 위인 옥탑방에 혼자 살면서 지영과 연애를 한다. 그리고 지영과 드라이브를 하러 나오는 장면이 건물을 벗어나는 두 번째 장면이다. 하지만 병수는 또다시 그 건물을 떠나지 못한다. 병수는 그를 기다리다 편의점에 와인을 사러 갔다 오는 딸과 건물 앞에서 마주치게 되고, 딸은 오래 기다렸다며 건물로 다시 들어가자고 말한다. 병수는 '담배 한 대만 더 피우고 들어가겠다'고 말하고, 딸은 해옥을 만나러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혼자 남은, 담배 한 대를 더 피우면 다시 해옥이 소유한 그 건물로 들어가야 하는 병수는 복잡한 표정을 짓는다.

병수에게 해옥이 소유한 그 건물은 본인이 벗어나지 못는 무언가이다. 그 안에는 그 누구보다도 우선 해옥이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드러내며 병수를 지켜본다. 병수가 하는 동거도, 연애도 모두 해옥이 지켜본다. 영화 관계자를 만나러, 혹은 애인과 드라이브를 하러 건물을 벗어나려하지만 결국 그 건물로 다시 돌아온다. 홍상수 감독은 아마도 그런 이유로 이 영화 제목을 '탑'이라고 짓지 않았나 싶다. 영화 속 그 건물은 일반적인 건물이 아닌 병수가 갇힌 탑인 셈이다.

이 영화는 영어 제목이 'Walk Up'이다. 1층, 2층, 3층, 옥탑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그린 듯한 제목임과 동시에 계단을 끊임없이 올라야 하는 느낌도 준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옥탑방에서 내려온 병수는 곧 딸을 따라 그 건물 1층으로 다시 들어가야 할 운명에 처했다. 아마도 병수는 또다시 2층, 3층, 옥탑방으로 올라가는 인생을 또 다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체념한 병수의 표정은 그렇게 말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