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점: 4/5
맷 리브스Matt Reeves가 감독한 더 배트맨(The Batman)(2022)은 여러 우려를 말끔하게 씻어냈다. 우려했던 식상함도 없었고 색깔도 독특했다. 로버트 패틴슨Robert Pattinson은 더 배트맨의 컨셉에 딱 맞는 브루스 웨인이자 배트맨이었으며 조이 크래비츠Zoë Kravitz는 매력적인 캣우먼이었다. 그리고 너바나Nirvana의 Something in the way는 놀랍도록 적확한 선곡이었다.
21세기 배트맨 영화는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이 만든 3부작을 넘어서거나 그와는 다른 매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매우 어려운 문제에 직면한다. 플롯 면에서나 캐럭터 면에서나 촬영 면에서 놀란 3부작을 넘어서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그와는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편이 낫다. 그리고 더 배트맨은 놀란의 배트맨과는 전혀 다른 매력을 선보인다.
놀란 3부작에 나오는 크리스챤 베일Christian Bale판 배트맨은 완성형이다. 그가 만든 계획은 빈틈이 없고 장비도 최첨단이다. 무술 실력도 천하무적급이다.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 베인에게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지만 이는 그가 약해서라기보다는 베인이 초인간적인 빌런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놀란 판 배트맨은 항상 확신에 차 있으며 무너짐이 없다.
패틴슨이 연기하는 배트맨은 놀란 판 배트맨과는 결이 아주 다르다. 그래서 식상하지 않다. 패틴슨 판 배트맨은 심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이다. 할 일을 해 나가기는 하지만 확신이 없다. 하나씩 드러나는 진실 앞에서 패틴슨 판 배트맨은 계속 혼란스러워 한다. 개인적인 트라우마와 관련된 진실들이기에 제대로 판단을 해내지 못한다.
패틴슨이 연기하는 브루스 웨인 또한 놀란 판 브루스 웨인과는 다르다. 놀란 판 브루스 웨인은 사회 생활 면에서도 완벽하다. 패틴슨 판 브루스 웨인은 정 반대다. 그는 사회 생활을 거의 하지 못한다. 웨인 가의 사업도 제대로 이끌어내지 못한다. 가면을 벗은 패틴슨은 창백하고 혼란스러워보이는, 아직 확신이라고는 없는 젊은이일 뿐이다.
더 배트맨은 분위기 면에서도 새롭다. 영화에서 흐르는 너바나의 Something in the way처럼 영화는 계속 손에 잡히지 않는 무언가가 공기 중에 도사리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더 배트맨의 음악 감독인 마이클 지아치노Michael Giacchino는 Something in the way의 코드 진행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무겁고도 긴장감 넘치는 사운드를 만들어내었다. 촬영 감독인 그렉 프레이저Greig Fraser는 어둠을 기가 막히게 잡아내었다. 영화 초반에 아무도 없는 검은 공간만이 잡히는 장면이 여러 차례 나오는데 그 어둠을 보고 지레 겁먹고 달아나는 범죄자들 뿐만이 아니라 영화를 보는 사람도 그 어둠 속에 배트맨이 숨어있는 것 같다고 느낀다. 그 이후로 영화가 진행되면서 어둠 속에서 진짜로 배트맨이 나타나는 장면이 여럿 나타나는데, 완전히 어두운 공간으로부터 배트맨의 실루엣이 보이고 점차 그의 모습이 드러나는 일련의 과정을 프레이저 촬영 감독은 훌륭하게 찍어내었다.
액션 장면도 놀란 3부작과는 느낌이 달랐다. 놀란 영화에서는 보통의 악당들과 싸우는 배트맨은 도무지 다칠 것 같지가 않다. 따라서 보는 사람도 불안하지가 않다. 힘의 우위가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배트맨에서 보이는 액션 씬에서는 '저러다 당하는 거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면서 바라보게 된다. 패틴슨이 타고 다니는 배트카도 놀란 판 배트카보다는 더 덜컹거리고 거칠며 부스터 외에는 별다른 기능이 달리지 않았다. 즉, 더 원초적이다.
더 배트맨을 보면서 맷 리브스도 배트맨 시리즈를 더 찍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패틴슨이 연기하는 배트맨을 더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에 나온 더 배트맨의 분위기를 유지한다면 놀란 3부작과는 완전히 다른 배트맨의 성장기 3부작이 나올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강력한 빌런이 나오는 상황보다는 배트맨의 내면적 변화와 성장에 집중하면서 이번 영화와 같은 색감과 촬영을 이어나간다면 또 한 편의 매력적인 시퀄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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